주교와 20 여년이나 활동해 오던 부교구장 다블뤼주교와 그 밖의 7명의 프랑스 성직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로써 조선교회와 사목조직을 와해시켰고, 남종삼, 홍봉주 등과 같이 교회의 중직을 맡았던 교인들 및 지방의 지도급 교인들까지 처형함으로써 교회의 조직까지 괴멸시킬 수 있었다. 이원
박해 속의 천주교회와 발전
1.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초기 박해
1) 박해의 시작
박해의 시작이라고 보기 보다, 처음으로 시련의 계기가 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가성직 제도의 부당함을 알게 된 조선 천주교회는 윤유일이 1790년 9월의 두 번째로 구베아 주교를 대면하게 된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주교회사 上, 下』를 중심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유홍렬(1911-1995)의 생애
유홍렬은 1911년 경기 장단 (長湍)에서 양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천주교를 잘 알지 못하였다. 16세 때(1926년)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의 인생관을 찾아다니며 힘쓰게 된다. 교회에도 가보고 목사님을 찾
주교회사 편찬에 착수했다. 그는 다블뤼(Daveluy)의 초벌원고를 위시하여 신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선교사들의 서한과 보고서를 검토하고 정리하여 2년 후인 1874년에 『Histoire de lEglise de Coree』(한국천주교회사) 상하 2권을 출판하였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하기 이전인 1870년부터 조
주교회의 기초를 놓은 김대건의 활동과 순교를 중심으로 병오박해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연구사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출발점으로 촉발된 4개월에 걸친 비교적 짧은 기간의 박해사건이었다. 따라서 한국 가톨릭의 박해사 연구에 있어서도 병오박해는 그 박해사적 관점보다는 ‘
서론
이번에 19c에 충청 지방에 천주교가 끼친 영향과 이에 따른 지역 사회의 대응 양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는 종교가 중앙 지방, 즉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천주교가 최초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을 끼쳤기에 여기에 충청 지방의 지리적 여건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중앙의 입장을 대변
또한 이순이 루갈다의 시댁, 즉 유항검의 가족은 신앙 안에서 서로 깊은 유대를 형성했고 특히 순교를 앞둔 상황에서는 이러한 가족애와 연대감을 더욱 명확히 표현했다. 이순이에 따르면 이순이의 시어머니(신희), 시숙모(이육희), 시동생(유문석), 시사촌 동생(유중성) 등 다섯 명은 감옥에서 주님을
주교였다. 천주교는 여러모로 나와 인연이 깊었다. 중학교 때 천주교 미션스쿨인 학교를 다녔고 이로 인해 귀동냥으로 천주교가 뭔지 삼위일체가 무슨 의미인지 정도 수준으로 얕게나마 천주교 교리에 대해 배웠다. 또 성모의 밤이라는 연례행사는 때론 귀찮기도 했으나 미사가 끝난 후 엔 재밌게 즐겼
천주교를 통하여 바라본 해미읍성과 솔뫼성지
개 요
1. 조선시대의 천주교
(1).조선시대 천주교 전개와 그 배경
(2).조선시대 천주교의 사회적 기능
(3).천주교 발전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박해 사례
(4).천주교 박해 원인
(5).천주교 사상 유입의 의의
2. 해미읍성
(1).해미읍성 소개
(2).해미읍성 내 건물
대원군과 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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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한 1866년 초부터 1871년까지 6년간에 걸쳐 전개된 천주교 대박해였다. 그에 앞선 몇 차례의 박해와 대비되는 특이성은 서구 식민주의 국가의 침략적 접근이 박해 발발의 외적 요소로 작용하여 외세의 무력 도전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